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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고려의 발전과 혼란기

by 세이브13 2023.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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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의 난

 

12세기 인종에서 고종 즉위 전후까지 90여 년간은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서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때 고려시대 초기부터 정치조직 자체에 내재되어 있던 문신 귀족 전성기의 타성과 부패 속에서 다양한 모순이 드러나면서 사회적 불만이 확산되었습니다. 개경의 부패한 귀족사회에서 이러한 논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이자겸의 반란으로 이어집니다.

귀족 세력의 대두는 필연적으로 그들 사이에 권력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세력이 점점 강화됨에 따라 인종과 의종 때 때 잇따라 귀족 반란이 일어났고 경원 이 씨의 반란은 그 정점을 이루었습니다.

11세기부터 대표적인 문벌귀족인 경원 이 씨가 외척이 되어 80년 넘게 권력을 잡은 적이 있습니다. 이자연의 딸이 문종황후가 되자 이자영의 손자 이자겸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이자겸이 예종 측근들을 몰아내고 왕위 계승을 허락함으로써 이자겸의 권력은 막강해졌습니다. 왕족과 혼인 관계를 맺은 이자겸은 황제보다 권력과 부를 많이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일족을  중요한 지위에 두고 반대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권력을 더욱더 강화하였습니다.

 

이자겸은 내부적으로 문벌 질서를 유지하고 외부적으로는 금나라와 타협하는 정치적 성향을 보였습니다. 한편 인종은  1126년에 이자겸의 권력 독점에 반대하며 측근세력을 결집했습니다. 그러자 이자겸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최준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합니다 이자겸은 인종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최준경과 함께 왕을 가두고 측근인 신하들을 억압합니다.  그 이후 최준경과의 불화로 해임되고 이자겸을 내쫓은 최준경까지 정지상의 탄핵으로 제거되면서 그의 난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자겸의 반란은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폭로하고 시민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자겸의 반란 이후 인종은 실추된 황권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정치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개경귀족세력 제거에 앞장섰던 묘청, 정지상 등 지방 출신 개혁적 세력이 부상하면서 김부식을 중심으로 보수세력 간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묘청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서경을 수도로 바꾸고 황권을 강화하여 자주적인 정치를 실행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서경으로 옮겨 새로운 왕궁인 대화궁을 세우고 금나라 정복을 주장했습니다. 서경은 고려 초기부터 북진정책과 관련이 있고 개경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중요했습니다. 

반면 개경을 기반으로 전통을 존중하는 김부식 등 개경귀족세력은 유교사상에 충실하고 사회질서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민생안정을 도모하고 금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구축하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정치 개혁과 대외관계의 의견 차이는 지역 간 갈등으로까지 번졌습니다.

묘청세력은 서경을 점령하기 어려워지자 반란을 일으켜 나라이름을, 연호는 천개라 하였습니다. 반대파인 김부식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정지상과 백수환을 살해하고 평양성을 포위하였습니다. 서경파는 끝까지 반항하였지만 1년 만에 묘청의 난은 끝나게 됩니다. 

 

 

 

 

무신집권의 시대 

 

 

12세기 들어 고려 지배층 내에서 문벌귀족과 측근의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격화되기 시작하면서 정치에 혼란이 생겼습니다. 이때 평소 문신을 우대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1170년 정중부와 이의방이 정부를 장악하고 다수의 문신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보냅니다. 이것을 무신정변이라고 하는데 최충헌이 나타나기까지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의민, 경대승 사이에는 많은 세력 다툼이 있었습니다.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은 정부의 주요 관청을 모두 독점하여 재산을 늘리고 권력을 잡기 위해 사병을 키워 그 세력을 키워갔습니다. 그 결과 중앙의 통제력이 점차 약화되고 백성에 대한 착취가 더욱 심해져 곳곳에서 여러 차례 봉기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무신 집권에 반발하여 농민과 노비의 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결과 20년 동안 짧은 기간 안에 여러 번 집권자가 바뀌는 혼란을 거듭하게 됩니다. 

1196년 최충헌 장군과 동생 최충수가 이의민을 죽이고 정부를 독점하면서 무인정치의 진전에 획기적인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최충헌 지역의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 최 정권의 기반이 아들 최우에 이르면서 더욱 강화되어 무인 정권의 조직 개편으로 이어집니다. 최우의 최체제 강화로 정방과 서방이 성립되고 최충헌이 조직한 도방이 더욱 확대됩니다. 또한 최우는 교정관을 살려 막부로 만들었고, 그 결과 교정관의 관직도 인정받아 역대 권력자들에게 필수적인 지위가 되었습니다.

 

 

 

 

농민과 노비의 난

 

 

의종 때의 사치와 향락은 국가 재정의 붕괴를 초래하고 농민 착취를 강화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빈곤에 빠진 농민들은 지배체제의 혼란과 무신의 하극상에 자극받아 신분을 해방시키고 지배계급의 착취에 저항하기 위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12세기 초부터 집단 도적이 되어 전국에 산발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1176년에는 망이, 망소이가 공주 명학소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크게 확산되었습니다. 경상도에서는 손청과 이광이 반란을 일으켰고, 군인과 관노들이 관리들의 가혹한 착취에 반발하여 전주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초기 반란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지방관리들의 억압에 항거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1193년 김사미 효심의 난으로 반란군은 연합전선을 펴면서 지속적인 양상을 보였습니다. 이로써 명주 농민반란군은 동경의 반란군과 합류하고 진주의 농민군은 합주의 부곡민과 연합하여 공동전선을 형성하게 됩니다. 또한 신라의 부흥을 외친 동경의 반란군은 운문, 울진등 각지의 반란군과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서로 밀접한 접촉을 가진 반란군들의 연합전선이 형성되어 10년 넘게 집권해 왔습니다. 이 반란은 지방뿐만 아니라 개경에서도 일어났습니다.

1198년 만적의 난 은 신분해방뿐만 아니라 정권을 잡기 위해서도 계획되었습니다. 이 반란은 모두 최충헌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반란군의 호소는 일부 정부 정책에 반영되었습니다. 고려 신분질서의 동요를 보여주는 이러한 반란은 고대 유산을 청산하려는 사회운동으로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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