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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 통일

by 세이브13 2023.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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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초 신라에서는 왕위쟁탈전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였고 조세수취에 반대하여 전국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발생하였습니다.  지방 호족이 중앙정부로부터 독립하여 세력을 키웠고, 그중에서도 신라 왕족인 궁예와 신라 장군인 경 훤이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경 훤이 먼저 후백제라고 자처하고 곧 궁예가 태봉을 설립합니다. 이로 인해 신라와 후삼국시대라고 불리는 후백제의 대립이 생겼습니다.

이후 궁예가 민심을 잃자 918년 통일신라 송악지역의 왕건이 궁예들을 몰아내고 왕의 자리에 올라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선언합니다. 국명은 고려 연호는 천수로 하고 919년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한편 926년 발해가 여진에 침략당해 멸망하자 발해 왕족을 비롯한 피난민들을 받아들여 세력을 확장합니다. 이는 왕건의 정치적 군사적 기반을 닦았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계승의식을 확립하면서도 신라 호족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대외정책에서는 궁예와 달리 친 신라정책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신라의 전통과 권위를 계승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왕건은 신라를 지키기 위해 금성에서 북쪽으로 50리 떨어진 땅에 신광진을 설치하고 고려 병사들을 주둔시켰습니다.

결국 신라 경순왕이 고려로 귀순하기로 결정했고 고려는 936년 신라 군사들과 함께 후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광종의 정치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과 정종 때 왕위가 불안정하여 황실과 그 외가 친척 간의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왕권의 불안정은 태조가 신라의 호족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취한 혼인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집권체제 확립을 위한 정책을 여러 가지 추진하였습니다. 광종은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노비안건법을 시행합니다. 이로 인해 공신과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 약화되었고 노비가 양민이 되어 세금을 부과하고 봉사할 의무를 지게 되어 국가 재정 기반과 제국의 권위가 안정되었습니다. 

 

957년 후주로 귀화한 쌍기가 신라의 독서삼품과를 계승 확장하자고 제안했고 958년에는 광종이 유학을 시험하는 과거 제도를 시행합니다. 과거에는 능력보다 신분을 우선시하던 기존 제도를 약화시키고 새로운 관리 제도를 마련하였습니다. 광종은 이를 통해 유학 경험이 있는 새로운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신진세력을 대체할 것을 모색했습니다. 또한 이는 무관 대신 문신을 관리로 사용하는 문치주의 전환의 조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과거 제도의 실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관료제도를 확립하는 기초였습니다. 이를 안정시키기 위해 관리의 공복 제정이었습니다. 복색을 가다듬음으로써 왕권을 중심으로 지배계급의 서열이 확립됩니다.

일련의 개혁으로 자신감을 얻은 광종은 공신과 호족 세력을 본격적으로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이에 따라 호족세력은 크게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었습니. 또 광종 자신이 황제를 자처하고 개경은 황도를, 서경은 서도를 칭하며 자신의 연호인 광덕과 준풍을 사용했습니다. 광종의 개혁은 경종시대의 경제개혁으로 이어졌고, 중앙관료의 경제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전시과 제도가 시행되었으며, 성종시대의 통치체제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문벌 귀족의 성립

 

성종 이후 중앙집권국가체제가 구축되면서 중앙에 새로운 지배계급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신라 말 지방 출신으로 여러 대에 걸쳐 고위관직을 유지하였는데 이들을 문벌귀족으로 불리었습니다. 문벌귀족들은 과전을 받고 공음전을 받는 등 여러 혜택을 누렸습니다. 자기들끼리 혼인관계를 맺어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11세기에는 고려 건국 이래 오랜 내정과제였던 왕권의 강화가 크게 강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왕권이 불안정한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성종의 다음 왕인 목왕이 폐위되고 대신 현왕이 즉위한 사례일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 고려에서는 신하가 왕을 바꾸는 일들이 자주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주변국가와의 관계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 고려의 대외관계는 매우 복잡했습니다. 고려는 송나라와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송나라의 뛰어난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거란 북방민족이 건국한 요나라가 강해지면서 동아시아의 상황은 붕괴됩니다.

 

즉 거란은 고려의 친송정책에 반대하여 양국 간의 외교관계를 단절시키고 고려를 요나라의 영향 아래 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0세기말 거란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고려에 항복을 강요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서희가 위기를 막고 강동 6주를 확보했습니다. 이때 고려는 정식으로 거란과 우호관계를 맺고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문화적으로 낙후된 거란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여전히 송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11세기 초, 이러한 외교적 모순을 빌미로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옵니다. 1010년 거란 성종이 고려의 수도 개경을 비롯한 서북지방까지 침입하면서 현종은 전라도 나주로 피난을 갑니다. 그러나 양규를 중심으로 한 고려군의 전투가 거란군의 기세를 약화시키고 고려와 강화 후 거란군이 퇴각합니다. 

1018년 거란이 다시 고려를 침략했으나 고려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고국에 패하고 귀주에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에 의해 크게 패한 것을 귀주대첩이라고 합니다. 결국 고려가 싸워 요나라를 제압하고 고려는 송 요나라 사이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게 됩니다.

전후 고려는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강감찬의 주도로 개경에 성곽을 축조하여 수도방위를 강화하고 북쪽 경계에 천리장성을 축조하였습니다. 이후 거란은 여러 차례 침략행위를 벌였고, 그 결과 고려는 거란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거란과는 비교적 평화로운 외교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고려는 이러한 내외부의 혼란을 극복하고 점차 사회와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10세기말 성종이 시행한 제도는 주로 당 체제를 모방한 것으로 제도 시행에 있어 고려 현실과 맞지 않는 요소가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11세기 고려에서는 고려 사회의 상황에 따라 부분적인 개편을 완료하고 제도를 완성시킵니다. 

또 다른 북방민족인 여진족과의 관계는 조금 특이했습니다. 여진족의 침략을 받았으나 그 세력이 크지 않아 회유책과 강경책을 번갈아 사용했습니다. 이후 여진족은 점차 세력이 커져 주변 국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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