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 역사

발해

by 세이브13 2023. 10. 30.
반응형

 

 

 

 

 

 

668년 당은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역의 고구려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습니다. 요동 일대에서는 고구려 난민들이 계속 당에 저항했고, 당은 고구려 난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영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구려 난민과 말갈족, 거란족 등 많은 민족이 당의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696년 5월 이준과 손만영이 마침내 영주 도독의 폭정에 맞서 일어나 혼란을 틈타 고구려 장군이었던 대사리 걸걸중상과 아들 대조영이 유민, 말갈과 함께 영주를 탈출해 만주 동부로 이주합니다. 말갈인을 이끌던 걸사비우와 고구려 유민을 이끌던 걸걸중상이 전사하고 조대영이 집단을 이어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대조영은 천문령 전투에서 자신을 쫓던 이해고와 당군을 격파하고 만주 동부에 남아 있는 고구려 난민과 말갈을 모아 길림성 인근 읍락의 동모산을 점령하고 당의 안동도호부를 정복하였습니다. 대조영 독자적인 연호인 천통을 사용하였습니다. 

 

당은 대조영의 발해 건국이 기정사실화되고 돌걸·거란·해의 압력으로 요하지역과 만주가 발해에 정복되면서 안동도호부가 무너지자 이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발해의 성장

 

대조영왕의 뒤를 이은 무왕은 인안이라는 원호를 사용하여 영토 확장에 전념하고 북동부의 여러 말갈족을 예속시켜 북만주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영토 확장의 편의와 지방 권력의 약화를 위해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현덕부로 이전합니다. 발해의 급속한 세력 확대는 주변국들을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발해 이북의 흑수말갈과 동맹을 맺고 대응합니다. 발해는 당을 계속 공격했고, 당나라 사람들은 발해를 두려워하였습니다.

흑수말갈과 당나라 연합에 반대한 무왕은 동생 대문예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했으나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나라로 도망칩니다. 이로 인해 문인 송환을 둘러싼 당과 발해 간에 여러 차례 외교 분쟁이 발생했습니다. 732년 가을 거란족이 당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사절을 파견하자 발해는 장문휴 장군에게 수군을 이끌도록 명령하고 산둥성 등주를 급습하였습니다. 한편 그는 요서의 마도산에서 대문예가 이끄는 당군과 충돌했습니다. 이때 신라는 당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발해에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겨울에 공격하여 진격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737년 무왕이 죽고 문왕 대흠무가 즉위하면서 대흥과 보력이라는 원호가 쓰이기도 했습니다. 문왕 때도 영토 확장이 계속되면서 말갈족을 복속하 그곳에 부(府)가 세웠습니다.

 

 

 

 

발해의 영토확장

 

문왕은 당과 우호관계를 구축하면서 당의 선진문화를 수용하고 내부 국가체제를 재편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756년 수도가 중경의 현덕부에서 상경으로 옮겨졌습니다. 이곳은 물자 교류의 중심지이며 주요 이동 경로였습니다.  발해의 수도가 상경으로 이전한 후 농업이 급속히 발전하고 인구가 크게 증가합니다. 발해는 또한 당의 문화를 받아들여 3성6부제를 실시하여 지방에도 경부, 주, 현으로 구성된 3단계 통치체제를 구축하게 됩니다. 또한 상경을 중심으로 주요 교통로를 마련하여 국내외 여러 지역을 연결하는 대외 무역에 더욱 집중하였습니다. 발해는 문왕왕 때부터 당과 우호관계를 구축하고 신라와의 항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기존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동시에 돌궐·일본과도 우호관계를 맺고 신라·당 견제정책을 추진합니다. 이러한 발전을 바탕으로 발해는 대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하였고, 762년 당나라는 문왕에게 발해국공을 하사하였습니다.

한편 문왕 말년에는 일시적으로 도읍을 동경용원부로 옮겼으나 성왕 때에는 다시 상경용천부로 천도합니다. 상경 용천부는 당나라 수도 장안성을 모방한 도시입니다. 793년 문왕이 사망한 후 지배계급의 내분으로 점차 국력이 쇠퇴하였습니다.

 

9세기 전반 선왕이즉위합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당나라는 발해의 번영을 해동성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중국 문헌에 따르면 발해는 바다 북쪽에 있는 몇몇 부족을 정복하고 흑수말갈을 비롯한 말갈족 대부분을 예속시켰습니다. 또한 요동지역에 대한 당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요하지역을 점령하고 그곳에 목저주와 현토주을 설치 운영합니다. 왕의 대외 정복을 바탕으로 발해가 가장 넓은 지역을 형성했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5경 15부 62주 지방제도가 완성되었습니다. 5경은 당시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발해의 쇠퇴


916년 야율아보기가 부족을 통일하고 대거란국을 건국합니다. 이후 발해와 거란의 요충지인 요동을 놓고 10년간 싸웠고 발해는 결국 소모전에 졌습니다. 요동을 잃은 발해에서는 당시 고구려인들과 동맹을 맺고 있던 말갈이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10년에 걸친 싸움으로 요동은 빼앗겼지만 발해는 924년 5월에  탈환한 후 거란인들을 붙잡았습니다. 925년 4월 요군이 발해 신주를 처음 공격하고 12월까지 요동방위선에 병력이 집중되게 됩니다. 요는 발해와의 교역로인 거란도 통해 기습공격을 해 사흘 만에 부여부를 함락시켰습니다. 이후 발해의 혼란을 틈타 요의 군대는 수도인 홀한성을 공격합니다.

발해와 요의 전쟁은 20년 가까이 계속되었습니다. 요동지역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는 요의 승리로 끝났고 발해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요동지역의 전략적 우위를 잃었습니다.

발해는 요동지역을 잃었지만 여전요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919년 요동을 병합한 요의 침략을 격파하고 924년 5월 발해가 거란의 요주를 공격해 공략한 뒤 거란의 포로를 잡는 것은 발해의 군사력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반응형

'한국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의 정치체제  (0) 2023.11.11
고려의 원 간섭기  (0) 2023.11.05
고려의 발전과 혼란기  (0) 2023.11.04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 통일  (0) 2023.10.31
남북국 시대  (0) 2023.10.29
통일신라의 건국과 발전  (0) 2023.10.29
삼국의 정치와 사회  (0) 2023.10.29
삼국의 정치구조  (0) 2023.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