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전쟁과 신라의 승리
신라는 진흥왕(540~576) 때 주변 영토를 적극 정복하고 삼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제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551년에 공격해 점령했습니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종파를 개편하여 사상 통합을 추진합니다. 이때부터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신라는 고구려의 통치하에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함경도 지역으로 진출하였고 562년 남쪽으로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완전히 지배하였습니다. 신라의 이러한 확장으로 백제를 탄압하고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의 수·당과도 직접 소통하여 그들과 연맹관계를 맺고 삼국의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신라의 대외 팽창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반격에 나섰습니다. 진흥왕 이후 진흥왕에 속한 영토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고, 선덕여왕대에 와서는 백제 의자왕이 대야성까지 함락되어 위기에 처했습니다.
고구려가 수·당의 침략을 저지하는 한편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김유신과 손잡고 권력을 장악하고 통치체제를 강화했습니다. 이후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위기를 극복하려 했으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지는 못했습니다. 그 결과 정부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연개소문 독재정치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신라는 결국 당과 나당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게 됩니다.
나당동맹 이후 신라는 반격하여 백제를 궁지에 빠뜨렸습니다. 그리고 660년 사비성 공략에 성공했을 때 의자왕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정치질서가 흐트러지고 국력이 쇠퇴하던 백제를 정복하게 됩니다. 또한 당시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인해 심하게 소모되었고, 연개소문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지역 간 갈등이 악화되어 국력분열과 내전이 빈발하게 된 바 있습니다. 이에 신라는 668년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정복하고 고구려 귀족들을 포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의 최종 목표는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이용하여 한반도를 지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라 문무왕은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과 연합하여 당과 정면 대결하였습니다.
신라는 백제의 영토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고구려 부흥운동을 후원했습니다. 이후 매소성에서 당나라 20만 명의 병력을 격파하고 나당전쟁에 주도권을 잡았으며 금강 하구 기벌포에서 당나라 해군력을 전멸시키고(676년) 당나라 권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말갈족은 여전히 대동강 북쪽과 옛 고구려의 북쪽 영토인 만주 지역에서 버티고 있어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서 약 30년간의 공백기를 거쳐 말갈 민족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건국하고 남북국 시대를 형성합니다.
신라의 전성기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인구는 영토확장과 함께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오랜 전쟁 후 대외 관계는 안정되고 생산성이 높아졌습니다. 이 무렵 신라는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고 무열왕에 이어 왕권이 강화되었습니다. 태종무열왕은 진골에서 온 최초의 왕으로 통일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이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후손만이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신문왕 때 김흠돌 사건을 계기로 귀족 권력이 재편되었습니다. 이후 신문왕은 진골귀족을 약화시키고 왕권의 기초를 다지며 집사부와 기밀업무를 담당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화백회의를 주도하던 상대등을 억압하였습니다. 또한 태종 무열왕 체제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5 묘제를 설치하였습니다. 그 후 685년에 5단계 관직제도를 완성하고 같은 해 9주 5 소경을 확립하였습니다. 군사제도로 9 서당 10정을 개설합니다.
호족의 성장
8세기 후반에는 국가기강이 해이해지고 중앙귀족 간 권력투쟁이 격화되면서 지방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고 지방에서는 군사력과 경제력, 새로운 사상을 가진 호족세력이 성장했습니다.
진골귀족들은 녹읍제도를 부활시켜 경제기반을 확대하고 군인들과 함께 세력확대를 위해 싸웠습니다. 혜공왕의 죽음과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에 즉위하면서 누구나 권력을 가지고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진골귀족들 사이에 널리 퍼졌습니다. 이렇게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은 왕위를 놓고 싸웠습니다. 점차 왕권은 약화되고 귀족의 연합이 강해지면서 시중보다 상대등의 힘이 커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녹읍을 기반으로 한 귀족의 지배가 유지되고 넓은 땅의 소유권이 확대되면서 농민들의 부담도 커졌습니다. 또한 자연재해가 계속되면서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이 국가재정을 고갈시키고 생활이 어려워진 사람들은 땅을 잃고 노예나 산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앙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고 지방에서는 반란이 잦아졌습니다.
통일신라의 쇠퇴와 멸망
10세기에는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가 신라 후기의 혼란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신라의 지배력이 저하되고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대립하던 삼국시대가 전개되게 됩니다.
궁예를 내쫓고 정권을 장악한 고려 태조는 신라와의 우호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습니다. 그의 신라와의 우호 정책은 나라를 빼앗긴 신라인들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태조는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돕고 후백제와 함께 싸웠으며, 신라인들의 신뢰를 얻어 결과적으로 경순왕의 자발적 항복을 받아 신라를 쉽게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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