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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삼국의 정치와 사회

by 세이브13 2023.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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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초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회 발전은 시대와 양상이 다릅니다. 세 나라는 아직 국가체제를 완성하지 못했지만 부족연합과 같은 사회를 넘어 점차 고대국가체제로 변모해 간 것입니다. 부족연맹 사회에서는 각 부족이 어느 정도 독립을 유지했지만 지배계급이 형성되고 왕권이 점차 계승되면서 부족권력은 왕권에 흡수되었습니다. 또한 대륙과의 잦은 접촉과 갈등을 통해 한의 정치조직이 수용되었고, 한의 정치제도에 기초하여 새로운 통치체제가 구축되었습니다.

특히 대륙과 직접 접촉할 수 있었던 고구려는 일찍부터 사회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죽 1세기 초 고구려는 왕호를 부를 정도로 발전하여 부족을 일종의 전사단족 조직으로 개편한 것입니다. 고구려는 5개 부족연합으로 시작하여 태조 때 연맹의 세력 확장으로 계루부 족장이 지배권을 잡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족 세력은 여전히 남아 있고 왕권은 견제되고 제한되었습니다.

고구려의 사회구조는 여러 차례의 정복전쟁으로 점차 중앙집권체제로 개편되었고, 4세기에는 고대국가로서 관료제와 신분제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적, 경제적으로도 나타나 194년에는 구호기관 특성을 띠고 진대법이 시행되었습니다.

 

한편 백제사회는 마한의 다양한 부족를 통제할 제도적 기반이 없고, 남하한 부여인에 의해 지배권이 확립되고 왕권이 강화되어 전통적인 사회적 유대가 강하지 않았습니다. 백제는 또한 한나라 군현과 북쪽 고구려의 압력과 영향력으로 통치기구를 갖추었기 때문에 백제 특유의 토착적인 면이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백제의 왕족은 본래 이 지역 부족세력과는 관련없는 유이민에서 유래하였으며, 왕권을 유지한 세력은  제8대 성씨로 대표되는 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이왕 때부터 6 좌평을 배치하여 직무를 수행하고 중앙집권국가의 틀을 구축하게 됩니다. 관등은 점점 분화하여 16등급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6개의 씨족을 기반으로 점차 부족연합을 형성하게 됩니다. 박석김의 시조로 등장했듯이 신라 사회는 고대사회의 후진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부족연맹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씨족을 기반으로 하는 6촌이 6부로 개편되면서 세력이 확대되고 점차 족장 칭호 바뀌면서 권력이 강화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기존사회의 관습을 유지하면서 약간의 새로운 제도를 첨가한 것뿐이었습니다.

 

한편 고대 한국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원시공동체 요소가 점차 해체되고 주요 세력을 중심으로 토지 사유가 나타나면서 점차 신분제도가 개편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삼국 중기

 

삼국은 모두 여러 진통을 겪으며 부족연합의 사회조직을 청산하고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부족연맹의 지배조직을 절대군주제로 전환 강화하고 왕권 확립, 부자 왕위 계승 등을 통해 중앙집권통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공포한 것입니다.  크고 작은 부족장들은 독립을 잃고 귀족의 길을 걷게 되면서 중앙과 지방의 관료기구에 흡수되었습니다.

고구려의 귀족제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수상은 대대로 에 임명되어 이들을 선출할 수 있는 일정한 계층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 아래 다양한 사회계층이 나뉘어 있어 다른 직위 중에서도 관직 임용과 결혼에는 한계가 있어 보였습니다.

백제에서는  8개의 성씨가 있어  백제 지배층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대 귀족사회의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신라 골품제도입니다. 골품에는 성골, 진골. 6두품, 5 두품등이 있었고 진골 중에는 고구려 고추가와 비슷한 갈문왕이라는 신분도 있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과거 지방분권적 조직을 청산하고 왕을 중심으로 한 관리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때 고구려의 12 관등, 백제의 16 관등, 신라의 17 관등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관직은 그 지위에 따라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경우 관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백제는 처음 6 좌평에서 시작하여 22부에 이르는 정비된 관직제도가 나타납니다. 신라에서는 국가를 감독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병부, 장부 등의 관청이 세워졌습니다.

삼국의 정치는 보통 합좌제도로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고구려에서는 재상인 대대로의 임명이 귀족의 선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백제에서는 정사암의 투표로 재상을 선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의 화백은 독특한 형태로 사 영지에서 실시되었습니다.

중앙 권력은 지방으로까지 확대되어 행정 구획의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옛날에는 부족이 살던 지역에 성을 짓고 이를 군이라고 했습니다. 이 대신들은 고구려에서는 처려근지, 백제에서는 군장, 신라에서는 군태수로 불리다가 일반적으로 성주로 불렸습니다. 그 후에는 고구려 5부, 백제 5부, 신라 각 주를 관할하는 행정부가 있었습니다. 중앙귀족의 거점인 서울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5부와 신라의 6부로 나뉜 특별행정구역이 있었습니다.

 

부족 연맹 시대의 군대는 부족 단위로 조직된 부족 집단의 연맹 단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 국가의 발전은 이들 연맹 단체를 해체하고 왕의 지휘 아래 전국적인 군대를 조직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왕은 곧 국가의 최고 지휘관이 되고 중앙 귀족들은 모두 장군이 되었습니다. 신라의 당은 그 같은 부속 조직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구려의 경당과 신라의 화랑도는 이런 귀족 세력의 보충을 목적으로 하는 청년 단체였지만 이 두 단체는 공통적으로 미성년 집단이라는 공동체적 유제를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경당에 모인 청년들은 경전을 읽고 화랑도는 원광이 가르친 세속오계를 믿고 훈련을 하였으며 유사시에는 국가 때문에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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