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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삼국시대

by 세이브13 2023.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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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배경

 

 

고구려

 

한족과의 대결과정에 점차 세력을 확장한 고구려는 유리왕 때 전항의 뒤를 이은 신왕조와 충돌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이후 태조 때부터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강력한 대외개발을 모색하고 요동군과 현도군을 자주 공격합니다. 고구려는 또 요하지역을 점령한 손 씨를 몰아내고 3국간 대립으로 중국이 혼란스러워하던 시기에 위나라를 공격하는 등 지배체제를 정비했습니다.

이후 을파소와 같은 유능한 대신들이 고국천왕 때 나타나 진대법을 통해 내정을 안정시키려 했으나 고국천왕 사후 형제간의 다툼으로 혼란이 빚어졌습니다. 그러나 발기의 난으로 고발 기를 탄압한 상왕에 이어 동천왕이 즉위한 후 다시 대륙과 다양한 관계를 발전시켜 위나라에 적극 대처하고 신라 침략을 이어갑니다. 이 정복전쟁의 결과 고구려는 막대한 토지를 점령하였고 왕실의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부자상속을 정착시켰습니다.

 

 

 

신라와 가야


오늘날 경주를 중심으로 성장한 사로국은 중국의 금속문화를 접할 기회가 적어 고구려나 백제보다 사회 발전이 더뎠습니다. 그러나 동해안에 정착한 석 씨와 연맹을 결성합니다. 그 후 이사금이 국호 계림으로 바고 6촌을 개편하여 6부를 행정구역으로 완성합니다. 이 시대 부족장은 군장을 뜻하는 거서에서 제사장을 뜻하는 차차웅으로 바뀌고 부족장의 권한을 가지. 는 이사금으로 변경됩니다. 이후 김알지의 후손인 김 씨가 미추왕 즉위 후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한편 금속문화의 확산이 늦어진 변한 지역의 여 부족국가들도 3세기 이후 가야라는 연맹을 결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제


백제의 경우 마한 50 부족 중 십 제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추홀과 위례성은 고구려를 탈출한 온조 집단이 처음 정착한 곳으로 비류가 자살하자 위례로 합쳐집니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목지국의 지배하에 있는 여러 세력을 점차 해체하게 됩니다. 다루왕과 초고왕의 치세 동안 토착 부족 세력이 연합하면서 점차 마한의 여러 부족들과 마찰을 빚었습니다. 이에 맞서기 위해 낙랑과 대방의 침략을 받 한강 유역의 부족국가들은 더 큰 연맹이 필요하 백제를 주로 굳건히 단결시켜 부족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삼국의 발전


후한이 멸망하고 위 촉 오 3국이 경쟁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고 있던 4~6세기에 세 나라는 정치적으로 큰 진전을 이루었는데, 그중 하나가 고대국가로 성장하기 위한 제도 개편이고, 다른 하나는 정복국가로 변모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고대 국가체제는 부족국가체제의 약화에서 출발하였다. 본래 부족장의 권한이 강한 상태에서는 분권화된 사회조직이 유지되어 강력한 왕권이 존재할 수 없었다. 부족연맹회의 수장인 왕도 각 부족장의 주권을 인정하는 기반 위에서 성립되어 강력한 절대왕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왕권의 세습이나 부자상속을 기대할 수는 없었으나, 선거에 의해 왕위가 변경되었다. 부여에서 가뭄과 장마의 책임을 왕에게 떠넘겨 왕을 폐위하거나 살해한 경우, 고구려 5부간 왕권의 이동이 있었다는 점 등 신라의 박, 석, 김이 번갈아 왕위를 이어받은 사실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점차 연맹장의 권력이 증가하고 부족장의 권력이 점차 약화된 지방의 부족장을 중앙으로 올려 귀족으로 조직할 수 있는 적절한 위치를 부여하였다. 이는 신라의 골품제에 등장하는 진골을 비롯하여 고구려와 백제에 진골과 17개의 관, 관을 설치한 것에서 잘 나타나는데, 단순한 부족연합사령관이었던 왕은 이를 통해 전통적인 부족장이 선출한 약한 왕권으로부터 부자를 물려받을 수 있는 절대군주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도적 측면에 앞서 사상의 통일을 위해 고대 왕권의 확립과 고대 국가체제의 유지가 요청되었고, 과거의 분권적·부족적 이념체계를 고대 국가이념체계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종합적이고 높은 수준의 사상과 윤리강령이 필요했습니다. 고구려(372년), 백제(384년), 신라(527)가 각각 불교를 수입하거나 인정한 것은 고대 한국의 이 시기로 고대 국가체제의 정비에서 불교가 이념적 체계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구려의 고대국가체제를 재정비한 소수림왕, 고국양왕을 이어 즉위 광개토왕과 장수왕은 요동에서 한강 유역까지 광활한 영토를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신라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의 뒤를 이은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탈환하여 삼국의 발전을 이끌었습니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북쪽에서 만주지역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쪽의 백제와의 싸움에서도 크게 승리하여 백제와 결탁하고 있던 일본군을 격파하였습니다. 이후 장수왕도 영토를 넓히려 했고, 이를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습니다. 평양 천도를 비롯한 일련의 남진정책이 신라와 백제 사이에 고구려에 대항하는 동맹을 수립하고 120년 이상 나제동맹이 유지됨으로써 신라는 스스로 역량을 키우고 향후 삼국 통일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신라는 서둘러 법흥왕대를 거쳐 진흥왕대까지 정복체계를 구축했고 당시 고구려는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두 세대 정복전쟁으로 많은 권력을 소모했습니다. 신라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한강 유역을 빼앗아 북동진 하여 현재 강원도와 함경남도 지역을 점령하고 나제동맹을 깨고 한강하류 지역을 정복합니다. 한강 유역을 점령한 신라는 한강 유역의 비옥한 땅, 서해안을 통해 당나라 등 중국 왕조와 접촉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을 봉쇄하게 되는 효과까지 얻게 됩니다. 내부에서는 불교를 공인하고 화랑들이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기 위해 길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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