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과의 전쟁
13세기 초 오랫동안 유목생활을 해온 몽골인들은 통일국가를 형성하고 금왕조를 공격하여 북중국을 점령하였습니다. 이때 금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 일부가 몽골에 쫓겨 고려를 침공하게 됩니다. 고려는 강동성에서 그들을 포위하고 거란을 추격해 온 두만강에서 몽골과 동진의 군대와 연합하여 거란을 토벌합니다. 그 이후 몽골은 거란을 몰아낸 것을 자신들이라며 과도한 공물을 요구해 왔습니다.
고려에 온 몽골 사절 저고여가 귀국길에 국경지역에서 거란족에게 살해되자 이를 빌미로 몽골군이 침략하였습니다. 의주를 점령하려던 몽골인들은 귀주성에서 박서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자 돌아서서 개경을 포위했습니다. 그 결과 고려가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몽골군은 그대로 철수하게 됩니다.
그러나 최우는 몽골의 무리한 공물요구와 간섭에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장기항전에 대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몽골군이 다시 침공하였으나 처인성 전투에서 김윤후가 이끄는 병사들이 끝까지 막아내면서 실패하게 됩니다. 이후 고려는 7번이나 몽골의 침략을 막으며 30여 년간에 기나긴 장기항전에 들어가게 됩니다.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정부는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저항과 외교를 함께 펼치며 몽골에 저항했습니다. 한편 지배계급은 부처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도로 팔만대장경을 제작하였습니다. 이때 고려는 수로를 통해 세금을 걷어들이며 조정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오랜 전쟁으로 나라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의 삶 또한 피폐해져 갔습니다.
나라의 혼란함 속에서 점차 세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문신들은 몽골과의 강화를 주장했습니다. 외세의 힘으로 무신을 몰아내고자 했던 문신들은 일부 무신들과 결탁하면서 최 씨 정권을 무너뜨립니다. 여러 무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끝내 1270년 몽골과 강화협정을 맺고 전쟁이 종결됩니다.
그러나 대몽항쟁을 주도한 삼별초 배중손은 개경환도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장기적인 저항을 계획하고 진도에서 저항하다 실패하자 제주도로 돌아와 끝까지 몽골에 저항합니다.
원나라의 지배
원나라의 침략을 받은 고려는 30여 년간 기나긴 항전을 벌였으나 결국 강화가 이루어졌으며 최 씨 정권은 붕괴되었습니다. 개경환도 후 왕정이 복구되었지만 고려는 원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갑니다.
고려는 원나라와 강화 이후 몽골군이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의 일본을 정복한다는 이유로 고려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습니다. 이후 고려왕실은 원나라 조정과의 혼인정책을 채택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그 결과 고려에는 몽골 풍습이 많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항쟁을 계속하던 삼별초를 정벌하고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게 됩니다.
고려왕은 몽골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 칭호와 계급이 격하되었습니다. 또한 고려는 왕에게 황제 칭호를 부여할 수 없게 되면서 몽골에 대한 충성심을 뜻하는 충을 붙이게 하였습니다. 한편 처음에는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 설치된 정동행성이 일본의 침략에 실패하면서 원나라가 고려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관청으로 바뀌게 됩니다. 고려 영토의 일부를 직접 관리하게 되는데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되어 철령 이북의 땅을 편입시키고 서경에는 동녕부가 설치합니다. 몽골의 지나친 공물요구는 농민들에게도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점차 사회가 변화하고 안정화되자 새로운 지배세력이 출현했습니다. 이때 새롭게 나타난 세력이 권문세족이었는데 이들은 몽골과의 우호 관계를 통해 새롭게 부상한 세력들이었습니다. 권문세족은 백성의 땅을 권력으로 빼앗아 농장을 만들고 백성을 억압하고 예속화하면서 권력을 키워갔습니다. 이에 피해를 입은 백성들은 살고 있는 곳을 떠나 방황하면서 국가의 질서와 기강이 무너지게 되는 현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신진사대부의 성장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와의 전쟁 중 고려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인구가 늘어나고 대규모 농업이 가능해졌습니다. 이쯤 중국으로 부터 비료를 사용하는 농업기술이 도입돼 한 땅에서 쉬지 않고 매년 농사를 할 수 있게 되어 농업생산량이 크게 늘어납니다.
사회의 혼란을 틈타 귀족들의 대농장이 점차 확대되면서 기존의 전시과가 그 기능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농장의 확대는 국가재정을 부족하게 했고 관리의 녹봉까지 폐지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무인 정권에 의한 귀족 정치의 붕괴 후 새로운 관료제가 출현했습니다. 그들은 교육을 받았고 정치 실천에 정통했던 〇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사회 진출은 마침내 고려의 정치적 경향을 바꾸었습니다. 이에 농장을 가지지 못한 신진사대부들은 크게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신진사대부들은 학문적 소양과 실무적 능력을 갖춘 세력이었으며 후에 공민왕이 권문세족의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등용하기에 이릅니다. 원명교체기에 즉위한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하여 권문세족을 축출하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대농장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비록 공민왕의 개혁은 권문세족의 반대로 실패하였지만 신진사대부들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와 거란 (0) | 2023.11.18 |
---|---|
고려의 사회와 문화 (0) | 2023.11.12 |
고려의 정치체제 (0) | 2023.11.11 |
고려의 발전과 혼란기 (0) | 2023.11.04 |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 통일 (0) | 2023.10.31 |
발해 (0) | 2023.10.30 |
남북국 시대 (0) | 2023.10.29 |
통일신라의 건국과 발전 (0) | 2023.10.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