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수취제도
고려 농민들은 토지를 경작하고 조세, 부역에 대한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고려의 토지제도인 전시과를 기준으로 납부하였습니다. 전조는 토지를 경작하고 수확물의 일부를 헌납하는 것으로 공전과는 달랐습니다. 공전은 1결마다 2석의 수확물을 내야 했지만 사전의 경우에는 그것보다 더 많은 수확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세율에 차이가 있었는데 그해 농사가 잘 되지 않을 때는 세금을 감면해 주어 농민의 어려움을 덜어주었습니다. 고려는 토지 개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진전(토지 대장에는 있지만 실제로는 경작하지 않는 토지를 개간하는 농민에게는 세제의 혜택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거둬들인 전조와 곡물과 특산물은 각 지방에 있는 조창에서 모은 다음 어 중앙으로 수송되었습니다. 전조 외에 공물을 상공과 별공이라고 불렀는데 별공은 그 지방에서 나오는 특산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농민들이 가장 부담이 컸던 것은 역이었습니다. 역은 군역과 요역으로 나뉘었으며 군역의 의무는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성에게 주어졌습니다. 요역은 국가의 공사가 있을 경우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군역의 경우 20세가 되면 지방 군으로 편입되어 그 의무를 이어갔습니다. 군역의 의무를 벗어나기 위해 유민이 되는 백성들도 있었습니다.
고려의 문화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정착되면서 유교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었고 후기에는 신진사대부에 의해 성리학도 전해졌습니다. 불교는 신라시대보다 더 확대되어 고려 생활 전반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불교사상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교종과 선종의 통합운동이 추진되었습니다.
고려 미술은 귀족의 우아하고 세련된 특징을 드러냅니다. 건축과 조각에서는 고대의 특징을 벗어났고 청자와 인쇄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고려 초기에는 유학이 확산되고 과거제가 실시됨으로써 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성종 이후에는 문치주의가 번성하면서 귀족들의 필수교양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고려인들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기 위해 다양한 예술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예술면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분야는 공예품이었는데 불교 의식에서 사용되는 생활도구를 중심으로 공예품이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자기 공예가 뛰어났는데 고려청자가 대표적인 공예품이었습니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나 다른 종교도 자유롭게 믿을 수 있었습니다. 고려 후기에는 조계종과 주자학이 융성하면서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불교에서 조계종은 백운과 태고 등에 의해 크게 유행하였느다 주자학이 나타나면서 불교계에서 영향력이 약해졌습니다.
충렬왕 이후 주자학이 중국에서 전해지면서 점차 발전하여 불교 배척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또한 사학의 발전으로 많은 역사책이 편찬되고 새로운 형식을 지닌 문학도 나타났습니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목조건물로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입니다 고려 후기에 가장 큰 특징은 사학의 유행으로 인쇄술의 발달과 목화의 전래, 최무선의 건의로 만들어진 화통도감에서 제조된 화약이라 할 것이다.
고려의 풍속
관복체제는 광종 때 송 체제로 바뀌었고 몽골이 내정 간섭기에는 몽골식을 따랐습니다. 이후 원명교체기에는 몽골식과 명나라식이 혼용되었습니다. 위화도 회군 후 명나라제도가 확정되어 조선까지 이어졌습니다.
일반인들은 보통 흰색 옷을 입었고 처녀와 총각은 댕기를 달았습니다. 귀족은 가죽 신발을, 서민은 짚신을 신었습니다. 죄인의 경우는 관이나 두건을 쓰지 못하는 등 제약을 두었습니다. 왕족이나 귀족들은 금이나 은그릇, 고려청자 같은 도자기를 사용했고 일반백성들은 토기나 놋그릇을 사용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크게 성행하였기 때문에 화장 풍습이 확산되었고 부모님의 상경우 보통 백일 동안 상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고려말 정몽주 등의 유학자들에 의해 3년간 상을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게 되었습니다.
불교문화가 크게 융성했던 고려시대에도 무속신앙은 인기가 많아 마을마다 산신을 모시는 신사와 서낭당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고려인들의 생활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려의 군사제도
고려는 중앙군과 지방 군으로 나뉘었으며 중앙군은 2군 6위로 구성되어 있었고 지방 군은 양계의 주진 군과 5도의 군현 군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2군 6위의 2군은 응양군과 용호 군으로 왕의 친위부대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6위는 수도를 방어하는 군대로 6개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중방은 2군 6위의 상장군과 대장군으로 이루어진 최고의 군사조직으로 군사에 대한 중요한 일들을 회의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최충헌의 집권 이후 교정도감이 중방의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전국의 모든 군대는 2군 6위에 소속되어 지위를 받았습니다.
또 예비군으로 불리는 광군과 별무반이 있었습니다. 광군은 정종 때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만든 군대로 중앙과 지방호족의 지배아래 조직되었으며 광군사에 소속되었습니다. 숙종 때 윤관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별무반은 기병부대인 신기 군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으며 여진족을 대비하기 위한 군대였습니다. 별무반은 평소에는 일반 훈련을 받다가 유사시에는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윤관은 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정벌하였으며 동북 9성을 설치하게 됩니다. 후에 동북 9성의 관리가 힘들어지자 여진족에게 다시 반환합니다.
이미지출처: ilovehz /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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