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족의 성장
거란은 만주지역에 살던 유목민으로서 오랫동안 여러 부족으로 살면서 주변나라의 간섭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당의 국력이 점점 약해지자 야율아보기가 흩어진 거란족을 통일하였습니다. 야율아보기는 부족을 대통합한 후 랴오닝을 도읍으로 정하고 나라를 세웠습니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화북지방을 정복하여 나라이름을 요로 변경합니다. 그 이후 만주지역과 북중국을 지배하는 대제국을 만드는데 송나라, 고려와 세력을 겨룰정도로 성장하게 되고 주변 나라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중국대륙을 차지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거란은 고려에 여러 차례 침입하였습니다. 송과 친하게 지냈던 고려고 자신들을 공격할까 위기를 느끼고 고려를 먼저 정복하려고 하였지만 세 차례의 침입에도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금과 송의 공격을 받아 요는 멸망하게 됩니다.
거란의 1차 침입
고려의 광종은 중국을 통일시킨 송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친송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북쪽으로 그 세력을 뻗어가려고 북진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고려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는 태조 때부터 고구려를 계승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압록강 근처에 살고 있었던 거란은 고려의 친송정책과 북진정책을 위기로 느끼고 송과 가깝게 지내는 고려와 먼저 외교를 맺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민족이 거란이라 하여 매우 싫어하였습니다. 거란이 고려와 친교관계를 맺기 위해 낙타 50마리를 사신과 보냈으나 태조는 다리 아래에서 낙타를 굶겨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80만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게 되는데 거란은 고구려의 옛땅이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때 고려의 서희가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므로 요의 땅도 모두 고려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 동쪽의 땅을 돌려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외교를 방해하는 여진족을 제거하면 거란과 외교를 하겠다고 설득하였습니다. 그러자 소손녕은 다시 돌아갔고 서희는 외교담판만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거란의 2차 침입
서북면을 지배하던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즉위시키는 강조의 정변이 일어납니다. 1010년 거란은 신하가 왕을 폐위 켰던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송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고려에 불만이었던 거란은 강동 6주를 다시 빼앗고 고려를 압박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거란군이 쳐들어오자 현종은 강조를 앞세워 30만의 군대를 이끌고 막아내려 하였지만 크게 패배하였습니다. 그 후 개경을 차지한 거란은 현종이 군신관계를 맺겠다는 약속을 하자 고려에서 떠납니다. 하지만 거란군이 요나라로 돌아가던 중 양규 장군이 급습하여 거란군 약 7천 명이 사망하는 등 거란은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거란의 3차 침입
현종이 거란과의 친교를 계속 거절하자 거란군이 침입하게 됩니다. 현종은 송나라에 도와달라고 요청하였지만 송의 국력 또한 예전 같지 않았고 거란과의 동맹도 맺고 있어 결국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여러 차례 거란의 침입을 받게 된 고려는 거란에 친교의 뜻을 보내는 척하며 전쟁을 위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하였습니다.
1018년에 거란은 현종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강동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10만 대군을 이끌며 고려에 침입합니다.
서북면 행영 도통사였던 강감찬은 2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거란에 맞서 싸웠습니다. 홍화진에서 군대를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삼교천의 물을 얕게 만들어 거란군이 지나갈 때 둑을 터트리고 매복시킨 기병들이 거란군에 큰 피해를 입힙니다. 이렇듯 뛰어난 전술로 강감찬은 요나라에 큰 타격을 주게 됩니다. 그러나 소배압 포기 하지 않고 계속 공격을 하며 개경까지 접근하였습니다.
그러자 강감찬은 식량과 물을 없애는 청야작전을 펼치며 거란군을 혼란스럽게 하였습니다. 기습공격으로 놀란 거란군은 후퇴하던 도중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감찬의 군대에게 큰 패배를 당합니다. 장수 소배압은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고 10만 명의 군사 중에 살아남은 군사가 수천 명밖에 안 될 정도로 아주 큰 승리였습니다.
귀주대첩 이후 거란은 강동 6주를 포기하고 고려를 정복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고려 또한 송과 친선관계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송과는 국교는 단절하였지만 송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활발한 교류는 하였습니다. 고려와 거란은 국교를 맺어 평화로운 관계를 지속시켰습니다. 거란과 국교를 맺은 후에도 고려는 거란과 여진과 같은 북방 민족들에 대한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서 압록강 입구부터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아 위기에 대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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