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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스 절약하고 현금으로 받자 (도시가스 캐시백 제도) 도시가스 절약 캐시백 제도 도시가스 사용량을 줄이기 위한 제도로 전년도 사용량보다 3% 이상 절약하면 줄이는 양에 따라 현금으로 돌려주는 제도입니다. 참여대상 주택난방용 / 중앙난방용 도시가스 요금제 사용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단, 전년도 사용량 자료가 없거나 전체사용량 조회가 불가능한 경우, 난방목적이 아닌 타용도 요금제를 사용하는 세대는 제외됩니다. 신청기간 2023년 12월 1일 ~ 2024년 (3월 4개월간) 절약기간 2023년 12월 ~ 2024년 3월 동안 (2023년 1월~ 4월 고지서 발행분) 전년도 대비 3% 이상 절감하면 캐시백을 받을 수 있고 절감률이 높을수록 받을 수 있는 캐시백도 높아집니다. 3% 이상 절감 50원 /㎥ 10%이상 절감 100원 /㎥ 15%이.. 2023. 12. 10.
고려와 거란 거란족의 성장 거란은 만주지역에 살던 유목민으로서 오랫동안 여러 부족으로 살면서 주변나라의 간섭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당의 국력이 점점 약해지자 야율아보기가 흩어진 거란족을 통일하였습니다. 야율아보기는 부족을 대통합한 후 랴오닝을 도읍으로 정하고 나라를 세웠습니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화북지방을 정복하여 나라이름을 요로 변경합니다. 그 이후 만주지역과 북중국을 지배하는 대제국을 만드는데 송나라, 고려와 세력을 겨룰정도로 성장하게 되고 주변 나라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중국대륙을 차지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거란은 고려에 여러 차례 침입하였습니다. 송과 친하게 지냈던 고려고 자신들을 공격할까 위기를 느끼고 고려를 먼저 정복하려고 하였지만 세 차례의 침입에도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 2023. 11. 18.
고려의 사회와 문화 고려의 수취제도 고려 농민들은 토지를 경작하고 조세, 부역에 대한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고려의 토지제도인 전시과를 기준으로 납부하였습니다. 전조는 토지를 경작하고 수확물의 일부를 헌납하는 것으로 공전과는 달랐습니다. 공전은 1결마다 2석의 수확물을 내야 했지만 사전의 경우에는 그것보다 더 많은 수확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세율에 차이가 있었는데 그해 농사가 잘 되지 않을 때는 세금을 감면해 주어 농민의 어려움을 덜어주었습니다. 고려는 토지 개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진전(토지 대장에는 있지만 실제로는 경작하지 않는 토지를 개간하는 농민에게는 세제의 혜택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거둬들인 전조와 곡물과 특산물은 각 지방에 있는 조창에서 모은 다음 어 중앙으로 수송되었습니다... 2023. 11. 12.
고려의 정치체제 고려의 정치 광종 이후 유학을 공부한 6두품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최승로였습니다. 최승로는 왕권의 전제화에 반대하고 유교를 바탕으로 귀족정치를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종에게 건의한 시무 28조는 최승로의 정치이념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종은 처음으로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고 지방호족의 세력을 약화시켜 중앙으로 흡수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고려는 귀족중심의 정치체제로 정착하게 됩니다. 고려의 귀족들은 문벌과 가문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세력을 확대시키려 왕실과의 혼인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혼인으로 정권을 장악한 세력이 나타났는데 안산 김 씨와 인주 이 씨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안산김 씨가 약 50년 동안 외척으로 권력을 잡았고 인.. 2023. 11. 11.
고려의 원 간섭기 몽골과의 전쟁 13세기 초 오랫동안 유목생활을 해온 몽골인들은 통일국가를 형성하고 금왕조를 공격하여 북중국을 점령하였습니다. 이때 금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 일부가 몽골에 쫓겨 고려를 침공하게 됩니다. 고려는 강동성에서 그들을 포위하고 거란을 추격해 온 두만강에서 몽골과 동진의 군대와 연합하여 거란을 토벌합니다. 그 이후 몽골은 거란을 몰아낸 것을 자신들이라며 과도한 공물을 요구해 왔습니다. 고려에 온 몽골 사절 저고여가 귀국길에 국경지역에서 거란족에게 살해되자 이를 빌미로 몽골군이 침략하였습니다. 의주를 점령하려던 몽골인들은 귀주성에서 박서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자 돌아서서 개경을 포위했습니다. 그 결과 고려가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몽골군은 그대로 철수하게 됩니다. 그러나 최우는 몽골의 무리한 공물요구.. 2023. 11. 5.
고려의 발전과 혼란기 이자겸의 난 12세기 인종에서 고종 즉위 전후까지 90여 년간은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서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때 고려시대 초기부터 정치조직 자체에 내재되어 있던 문신 귀족 전성기의 타성과 부패 속에서 다양한 모순이 드러나면서 사회적 불만이 확산되었습니다. 개경의 부패한 귀족사회에서 이러한 논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이자겸의 반란으로 이어집니다. 귀족 세력의 대두는 필연적으로 그들 사이에 권력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세력이 점점 강화됨에 따라 인종과 의종 때 때 잇따라 귀족 반란이 일어났고 경원 이 씨의 반란은 그 정점을 이루었습니다. 11세기부터 대표적인 문벌귀족인 경원 이 씨가 외척이 되어 80년 넘게 권력을 잡은 적이 있습니다. 이자연의 딸이 문종황후가 되자 이자영의.. 2023. 11. 4.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 통일 10세기 초 신라에서는 왕위쟁탈전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였고 조세수취에 반대하여 전국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발생하였습니다. 지방 호족이 중앙정부로부터 독립하여 세력을 키웠고, 그중에서도 신라 왕족인 궁예와 신라 장군인 경 훤이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경 훤이 먼저 후백제라고 자처하고 곧 궁예가 태봉을 설립합니다. 이로 인해 신라와 후삼국시대라고 불리는 후백제의 대립이 생겼습니다. 이후 궁예가 민심을 잃자 918년 통일신라 송악지역의 왕건이 궁예들을 몰아내고 왕의 자리에 올라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선언합니다. 국명은 고려 연호는 천수로 하고 919년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한편 926년 발해가 여진에 침략당해 멸망하자 발해 왕족을 비롯한 피난민들을 받아들여 세력을 확장합니다. 이.. 2023. 10. 31.
발해 668년 당은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역의 고구려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습니다. 요동 일대에서는 고구려 난민들이 계속 당에 저항했고, 당은 고구려 난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영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구려 난민과 말갈족, 거란족 등 많은 민족이 당의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696년 5월 이준과 손만영이 마침내 영주 도독의 폭정에 맞서 일어나 혼란을 틈타 고구려 장군이었던 대사리 걸걸중상과 아들 대조영이 유민, 말갈과 함께 영주를 탈출해 만주 동부로 이주합니다. 말갈인을 이끌던 걸사비우와 고구려 유민을 이끌던 걸걸중상이 전사하고 조대영이 집단을 이어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대조영은 천문령 전투에서 자신을 쫓던 이해고와 당군을 격파하고 만주 동.. 2023. 10. 30.
남북국 시대 신라가 통일전쟁에서 승리한 676년부터 국가체제를 개편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귀족권력을 재정비합니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의 주민들을 통합하여 인구 증가와 생산성 향상으로 세금이 늘어나 수도를 재정비하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였습니다. 그 이후 만주에서 새로운 세력이 나타났는데 698년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읍락에 있는 동모산을 점령하고 진극을 건국한 뒤 곧바로 국명을 발해로 바꾸고 스스로 고구려의 후손이라 주장합니다. 서기 900년 견훤이 남서부에 후백제를 창건하면서 신라의 분열이 시작되었고 이듬해 궁예가 신라 북부에 후고구려를 창건하여 후삼국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따라서 이때부터 남쪽 신라가 분열되고 후삼국시대가 전개되면서 사실상 남북시대의 양상과 공존하게 됩니다. 918년 태봉 왕건이 .. 2023.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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